샤워기 물이 바뀌면 피부도 달라질까? 경수와 피부 건조의 관계
한국에서는 괜찮았는데 해외여행이나 유학을 시작한 뒤 샤워만 하면 얼굴과 몸이 유난히 당기고 머리카락까지 뻣뻣해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흔히 “물이 안 맞는다”고 표현하는데, 단순한 기분 탓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지역마다 수돗물에 포함된 미네랄의 양이 다르고, 특히 칼슘과 마그네슘 함량이 높은 물을 ‘경수(hard water)’라고 합니다. 경수가 모든 사람의 피부를 건조하게 만든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경수 환경과 피부장벽·습진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연구는 있습니다. 특히 경수에서 세정제를 사용할 때 피부에 계면활성제 잔류가 증가해 자극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제시됩니다. 다만 이미 생긴 아토피피부염을 물만 부드럽게 바꿔 치료할 수 있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피부 가려움이나 염증, 갈라짐이 지속된다면 단순히 물 문제로 판단하지 말고 피부과 전문의와 상담하는게 좋습니다.
경수는 ‘물이 더 센 것’이 아니다
경수와 연수를 나누는 기준은 물에 녹아 있는 미네랄과 관련됩니다. 경수에는 상대적으로 칼슘과 마그네슘 같은 미네랄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수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비누 거품이 잘 나지 않거나 욕실 수전에 하얀 물때가 쉽게 생기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피부에서 중요한 부분은 경수 자체만이 아니라 경수와 세정제가 만났을 때의 변화입니다. 한 실험 연구에서는 경수로 세정했을 때 피부에 소듐라우릴설페이트(SLS) 잔류량이 증가했고, 이는 경피수분손실 증가와 피부 자극과 관련됐습니다. 특히 아토피피부염이 있거나 피부장벽과 관련된 특정 필라그린 유전자 변이를 가진 참가자에서 영향이 두드러졌습니다.
경수가 아토피피부염을 만든다는 뜻일까?
여기서는 연구 결과를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2021년 발표된 체계적 문헌고찰과 메타분석에서는 경수가 더 단단한 지역에 사는 어린이에서 아토피습진의 가능성이 높게 관찰됐습니다. 그러나 연구진은 이 연관성에 대한 근거 확실성을 매우 낮은 수준으로 평가했습니다. 연구 결과도 모두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페인의 출생 코호트 연구에서는 물의 경도와 소아 습진 사이에 뚜렷한 연관성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인 대상 대규모 관찰연구에서는 경수가 심한 지역에서 기존 습진의 유병 가능성이 다소 높았지만 새로운 습진 발생과는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경수 때문에 피부염이 생긴다”는 식의 단순한 결론은 현재 근거보다 앞서갑니다.
해외에 가자마자 피부가 건조해졌다면?
여행이나 이사 직후 피부가 달라지면 모든 원인을 수돗물에서 찾기 쉽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바뀐 환경이 상당히 많습니다. 비행기 안의 낮은 습도, 현지의 건조한 기후, 냉난방, 평소보다 뜨거운 샤워, 새로운 호텔 어메니티와 세정제, 수면 부족까지 피부 상태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특히 평소 사용하던 클렌저 대신 세정력이 강하거나 향이 많은 제품을 사용했다면 경수와 함께 자극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피부가 갑자기 당긴다면 ‘물갈이’ 하나로 결론 내리기보다 물·세정제·온도·습도·샤워 습관이 동시에 바뀌지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샤워기 필터를 달면 해결될까?
여기서 소비자가 가장 헷갈리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시중의 모든 ‘샤워기 필터’가 물을 연수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필터마다 제거하도록 설계된 물질과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필터라는 이름만으로 칼슘과 마그네슘이 충분히 제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경도를 실제로 낮추는 대표적인 방식 중 하나는 칼슘·마그네슘 이온을 다른 이온으로 교환하는 이온교환식 연수기입니다. 그렇다고 연수기를 설치하면 피부질환이 좋아진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등도~중증 아토피습진이 있는 어린이 336명을 대상으로 한 무작위 대조시험에서는 가정에 이온교환식 연수기를 설치해도 기존 치료만 받은 그룹보다 객관적인 습진 중증도가 유의하게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즉 연수는 의학적 치료를 대체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물이 걱정된다면 화장품보다 샤워습관을 바꿔
환경을 당장 바꾸기 어렵다면 피부가 받는 자극을 줄이는 방법부터 시도할 수 있습니다. 뜨거운 물로 오래 씻기보다 미지근한 물을 사용하고, 피부를 뽀득뽀득하게 만들기 위해 세정제를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샤워 후에는 수건으로 세게 문지르지 말고 가볍게 눌러 물기를 제거한 뒤 피부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보습제를 사용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해외에 장기간 머문다면 처음부터 새로운 화장품을 여러 개 구입하기보다 평소 피부에 잘 맞았던 순한 클렌저와 보습제를 가져가는 방법도 현실적입니다.
‘물이 안 맞는다’는 느낌, 생활습관까지 점검
지역이 바뀌면서 피부가 갑자기 거칠고 당긴다면 수질 차이는 고려해볼 만한 요소입니다. 경수와 세정제가 피부 표면에서 상호작용해 피부장벽에 영향을 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부 건조나 피부염을 모두 경수 탓으로 돌리거나 고가의 샤워 필터를 설치하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근거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물이 바뀌었다면 물만 바뀐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기후와 습도, 샤워 온도, 세정제와 생활패턴까지 함께 살펴보고 피부가 계속 붉거나 가렵고 갈라진다면 ‘물갈이’라고 버티기보다 정확한 피부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